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치 독일 (문단 편집) ===== 1943년 - 1945년 ===== ||[[파일:1943-07-01GerWW2BattlefrontAtlas.jpg|width=100%]]|| || 1943년 7월 1일의 전황.[* [[쿠르스크 전투#성채 작전|성채 작전]] 직전의 전황이다. 위의 전투에서 오룔(Orel) 남쪽에 튀어나온 돌출부가 바로 성채 작전의 대표격인 [[쿠르스크 전투]]가 벌어진 쿠르스크.] || 1943년으로 넘어오면서 전황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아직은 독일군이 건제했던 1943년 2월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이끄는 홀리트 분견군이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잠시 소련군의 예봉을 꺾기도 했으나, 히틀러는 이걸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주도권을 가져온 것으로 오판하고 역으로 무리해서 성채 작전을 벌였다가 1943년 7월에 벌어진 [[쿠르스크 전투]]에서 참패하고 8월에 소련군이 역으로 벌인 드네프르 강 공세로 인해 전선이 [[드니프로 강|드네프르 강]]까지 밀려버린다. 이후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주도권을 잡는 일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없어지게 된다. 이후 한 번 기울어진 전세는 다시는 뒤집히지 않았다. 서방 연합군은 독일군이 쿠르스크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이탈리아에 상륙]]했고,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은 무너져 버렸다. 무솔리니 정권이 무너지자 독일은 이탈리아 북부를 재빨리 점령하고 이탈리아군을 무장해제시킴과 동시에 [[오토 스코르체니]]를 투입해 무솔리니를 구출, [[괴뢰국]] 살로 공화국을 건국함과 동시에 이탈리아의 남북으로 길쭉한 지형을 이용해 방어 태세에 나서는 발 빠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결국 1943년 겨울 소련군의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로 인해 남부집단군이 격파 당하면서 우크라이나를 빼앗겨 버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4년 6월 6일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서방 연합군이 프랑스에 진출했고, 6월 22일에는 동부에서 소련군이 [[바그라티온 작전]]을 펼쳐 독일 중부 집단군을 분쇄해 버렸다. 이로 인해 나치 독일의 영토는 독소전쟁 이전의 수준으로 축소되어 버렸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econd_world_war_europe_1943-1945_map_en.png|width=100%]]|| ||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군과 연합군의 유럽 공세를 정리한 지도. 위 지도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쫙쫙 밀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이 와중에 1943년과 1944년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핀란드]][* 핀란드는 독일이 [[삼국 동맹 조약]]에 서명하라는 부탁을 거절하고 추축국이 되지 않았다.]가 독일과의 동맹 조약을 파기하고 연합국에 항복하여 연합국의 편에 서서 총부리를 독일 쪽으로 돌렸는데[* 루마니아는 독일의 가장 큰 석유 공급원이었다. 루마니아를 잃어버린 이후 독일은 [[헝가리]]에서 나오는 석유 조금과 석탄을 액화시켜 얻은 석유 대용품만으로 싸우게 된다.], 이로써 독일의 편은 헝가리와 일본만 남았다. 그나마도 [[태평양]]은 별개의 전역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헝가리를 제외하면 유럽 전역이 독일에 등을 돌린 것이다. 이들 동맹국들을 잃게 되자 독일 공군과 육군 기갑부대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게다가 헝가리 역시 1944년 10월, 루마니아와 비슷하게 [[호르티 미클로시]]의 지휘 아래 연합군에 투항하려고 했으나 슈코르체니가 호르티 제독의 아들을 납치한 데다가 독일군 역시 적극적으로 개입했기에 이는 실패했고 헝가리에는 친독 괴뢰국 [[헝가리 국민단결정부]]가 수립된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헝가리 국민단결정부 역시 [[부다페스트 공방전]]으로 소련군에게 점령 당하며 멸망하여 독일의 노력은 수포가 되었다. 한편 남은 또 다른 동맹국 [[일본 제국]]은 애초에 멀리 떨어져 있어 독일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영원히 독일 통제 아래에 있을 것 같았던 폴란드에서조차 [[바르샤바 봉기]]가 벌어지는 등 나치 독일의 상황은 혼란스럽게 그지없었다. 그나마 바르샤바 봉기는 독일이 성공적으로 진압하기는 했지만, 얼마 뒤 독일이 소련군의 공격으로 폴란드를 상실하면서 큰 의미가 없었다. 이에 히틀러는 동부전선의 정예부대들을 다수 서부전선으로 차출하여 병력을 모은 뒤 연합군의 보급 물자가 들어오던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펀]] 점령을 목적으로 1944년 12월 [[아르덴 대공세]]를 펼쳤으나 실패했다. 히틀러와 [[알프레트 요들]] 등 일부 독일군 장성들은 안트베르펀을 점령하면 노르망디를 제외하고 북프랑스 인근에 연합군의 보급항이 없으므로 보급을 끊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무리한 공세를 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고, 당시 미군의 아르덴 방면 방비가 허술했으며, 날씨 또한 매우 좋지 않아 연합군이 공군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지 못했기에 여기에 약간의 희망을 걸어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발터 모델]]이나 [[핫소 폰 만토이펠]] 등이 수없이 경고했듯이, 당시 독일군의 보급 문제는 처참했고 본질적으로 제공권도 연합군 측에 완전히 장악되었던지라 결국 공세는 얼마 못 가 실패했다. 오히려 이 때문에 동부전선에 구멍이 나 버렸고, 이에 소련군은 쉽게 독일 영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B%A7%9D%ED%95%9C_German_Reich_%28WWII%29.png|width=100%]]|| || 1945년 5월 8일 항복 시점에 독일군이 통제하고 있던 지역.[* 이들 지역 말고도 독일 영토 대부분에서 독일군 패잔병과의 전투가 이어졌다. 하지만 나치 독일에 반감을 품고 있었던 저항 세력과 시민들이 오히려 연합군을 돕거나 같이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이미 나치 독일이 점령했었던 영토 자체 내에서도 전투가 계속 오갔다고 한다. [[이터성 전투]]와 같은 경우로 반나치 독일군들도 연합군에 가담한 경우가 있다고 한다.] || 1945년 1월 소련군은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를 실시, 비스와 강을 건너 독일 본토로 진격했다. 이 즈음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봄의 새싹 작전]]이라는 마지막 발악을 시도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이후 소련군은 1945년 5월 2일 [[베를린 전투|베를린을 함락시켜]] 베를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았다.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4월 30일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으며, 1945년 5월 8일에 [[카를 되니츠]]가 수반으로 있는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했다. 단, 이와는 별개로 플랜스부르크 정부 자체는 5월 23일까지 존속했으며 이후 해체되고 독일의 전 지역은 [[연합군 점령하 독일|연합군의 점령하에 놓인다.]] 참고로 항복 당시 독일군의 통제하에 놓여 있던 지역은 [[노르웨이]],[*최북단 일부가 핀란드를 통해서 건너온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통제하에 있었다.] [[덴마크]] 및 북독일 극소수 지역, 남독일, [[오스트리아]] 및 [[체코슬로바키아]] 일부 지역,[* 베를린 함락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특히 [[프라하]] 인근의 독일군은 서방 쪽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이반 코네프]]가 이끄는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공격으로 인해 싸그리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저 멀리 있는 쿠틀란드 포켓[*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라트비아]] 지역에 고립된 독일군들을 뜻한다. 이들은 숫자가 꽤나 되었기 때문에 소련군도 제압하자면 큰 피해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대치를 이어가다가 나치 독일이 항복했다는 사실을 소련측에서 전하고 나서야 항복했다.]이 전부였다. 이 외에도 네덜란드 북부나 프랑스의 항구도시 [[라 로셸]][* 1945년에도 나치 독일이 점거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이 이 지역을 네이팜탄으로 폭격하여 최소 1,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기도 했다.]등 유럽 전역에 소수의 독일군이 잔존하며 통제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전황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